롯데그룹에서 CEO가 되려면 갖춰야 할 '두 가지'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입력 2022-12-19 10:01   수정 2022-12-19 16:17

‘CEO는 주가로 평가받는다’. 한국적 현실에서 꼭 맞는 공식은 아니지만, 상장사 대표는 자신의 실적을 주가로 증명해야 한다. ‘오너’라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단기 실적으로 그룹 총수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신의 비전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주가가 필수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그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신 회장이 대표이사이자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롯데지주의 주가는 2016년 초 10만원 고지를 한번 찍고는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16일 종가는 3만2350원에 불과하다.
롯데지주 대표이사 신동빈의 주가 성적표
2017년 ‘사드 사태’를 기점으로 최근까지 신 회장과 롯데지주가 겪은 불운은 한국 기업사(史)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처절했다. 미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롯데가 보유한 경북 성주의 골프장에 짓겠다고 하자, 중국은 한한령과 함께 롯데의 중국 기반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타국이 무법에 가까운 행위로 자국 기업을 옥좼는데도 롯데는 오히려 국내에서 친일 기업으로 몰렸다. 스키를 사랑한 신 회장은 동계스포츠 지원으로 인해 옥고까지 치러야 했다. 그룹 매출 100조원을 꿈꿨던 롯데는 재계 5위마저 위협당할 지경에 몰렸다. 2020년, 2021년 2년간 롯데는 1만명에 가까운 인력을 내보내야 했다.

지난 5년의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신 회장은 사실상 두문불출했다. 코로나19 펜데믹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 회장은 ‘잃어버린 5년’에 대한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재계 모임을 비롯해 공식적인 행사엔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의 말벗은 주로 이온그룹 회장 등 일본 재계 인사들이었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가뒀던 신 회장이 최근 들어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롯데그룹이 스키&스노보드단을 창단한다는 소식은 이와 관련한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신 회장의 스키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선수급 실력의 소유자인 그는 주요 재계 인사 중 골프를 안 치는 몇 안 되는 기업인이다.
5년간의 고립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롯데
롯데의 ‘잃어버린 5년’이라 불리는 시기에 신 회장은 외부와 단절한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어느 그룹 못지않은 치열한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선친이자 롯데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일궈놓은 롯데를 유지하면서 신동빈만의 비전이 담긴 ‘뉴 롯데’를 설계하기 위한 고민이다.

실제 롯데는 불과 1~2년 만에 그룹 포트폴리오를 미래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올해 롯데헬스케어와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지주 계열사로 출범시켰다. 배터리 소재 기업인 일진머티리얼즈를 비롯해 미국의 CDMO 기업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을 인수했다. 모빌리티(포티투닷, 쏘카), 유통(미니스톱, 중고나라), 배터리(스탠다드에너지) 등 신규 투자와 M&A에 투자한 금액이 3조원을 웃돈다.

겉으로 보여지는 M&A 성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롯데 내부의 변화다. 신 회장은 ‘미래를 담을 그릇’을 찾는데 누구보다 진심이다. 사람에 대한 갈증의 원인은 그룹의 포트폴리오에서 비롯됐다. 80여 개 계열사에서 약 8만5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롯데그룹의 핵심 4개 사업군은 식음료, 유통, 호텔&리조트, 케미칼이다.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가 1967년 설립된 이래 롯데쇼핑, 롯데호텔, 롯데케미칼 등 주력 계열사 대부분이 1970년대에 세워졌다. 주력 사업이 내수에 치우쳐 있는 데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부분의 계열사가 특별한 변화 없이 지속되다 보니, 인력의 순환이 활발하지 못했다.

작년과 올해 단행된 롯데 임원인사는 신 회장의 ‘인사 실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외부 출신 CEO인 김상현 유통HQ 총괄대표(부회장)를 선임했고, 롯데제과는 12월 15일 자로 LG생활건강 출신인 이창엽 부사장을 대표로 영입했다. 두 회사 모두 외부 출신 CEO는 창사 이래 처음이다.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인사 실험'
신 회장은 올해 유난히 인사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인사를 위한 계열사별 이사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누가 어느 자리에 선임될지가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신임 CEO들은 1주일 전쯤 통보를 받았는데 올해는 인사 발표 하루 전쯤에야 대체적인 인사 발표안의 윤곽이 점쳐졌을 정도로 보안 강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보안 문제도 있었지만, 인사안이 내부에도 비밀에 부쳐진 데엔 신 회장 결재가 늦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 하루 전까지도 결정 나지 않은 인사가 있었을 만큼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롯데제과는 이영구 식품군 총괄대표를 보좌할 신임 대표를 뽑는다는 것 외에 누가 할지는 신 회장이 복수의 후보군 중에서 막판에 결정했다”며 “작년에 호텔&리조트 총괄대표로 선임된 안세진 사장이 이번에 빠진 것도 그룹 내에서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고 귀띔했다.

작년과 올해 단행된 파격 인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신 회장의 확고한 인사 원칙은 비전과 조직 장악력이다. ‘미래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임직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파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CEO’를 찾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과거의 롯데’와 결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롯데에선 숫자로 모든 걸 얘기한다는 말이 있었다”며 “전년 대비 매출, 영업이익을 늘리는 것만이 CEO의 역할이던 시대를 벗어나겠다는 것이 신 회장의 의지”라고 말했다.

15일 정기 임원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이훈기 롯데지주 ESG경영혁신실 실장은 뉴 롯데의 인사 범주에 딱 들어맞는 인물로 꼽힌다. 1967년생인 이 사장은 롯데의 대표적인 전략통이다. 바이오, 헬스케어, 배터리, 모빌리티 등 롯데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 대부분이 그가 이끄는 ESG경영혁신실(옛 미래전략실)에서 나왔다.
'미래를 담을 그릇'에 '올인'한 롯데
이훈기 사장이 그룹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롯데의 ‘차세대 리더’라는데 이견을 다는 이들은 거의 없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 그룹 CEO 중에선 몇 안 되는 서울대 출신이다. 상무 시절에 말레이시아 롯데케미칼 타이탄 대표를 지내는 등 일찌감치 CEO 수업을 받았다. 롯데렌탈 대표까지 역임하면서 롯데 내에선 B2B와 B2C를 모두 섭렵한 거의 유일한 임원이다.

이완신 사장에게 신임 호텔군 총괄대표 겸 호텔롯데 대표를 맡긴 것도 신 회장의 인사 원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총괄대표의 거취는 인사 직전까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롯데그룹 내에서조차 “이완신 사장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50대50의 가능성”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예측 자체가 어려웠다. 1960년생인 이 사장은 이동우, 박현철, 김상현 등 현 부회장단과 나이가 비슷한 데다 ‘올드 보이’로 취급받는 백화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대표가 위기의 롯데호텔을 구할 구원투수로 투입된 건 그가 롯데홈쇼핑에서 보여 준 비전과 조직 장악력 덕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 대표는 가상 인간 루시로 메타버스 마케팅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초대형 벨리곰을 통한 공간 마케팅으로 실력을 입증했다. 안세진 전 대표가 리조트 사업부를 호텔로 합치고, 김해 스카이힐CC 등 유휴 자산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 임무를 수행하는 데만 집중했다면 이완신 신임 대표는 롯데호텔&리조트의 미래를 그려야 하는 중임을 맡을 전망이다.

신 회장의 ‘인사 실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려의 시선도 많다. 롯데호텔만 해도 외부 인사를 중용하면서 일각에선 최근 1년 사이 서비스 품질이 신라호텔이나 신세계 계열의 호텔(조선팰리스, 조선호텔)만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KAIST 교수 출신인 배상민 사장이 이끄는 디자인혁신센터에 대해선 롯데그룹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롯데에 디자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은 다들 공감하는데 문제는 디자인센터가 각 계열사 CEO와 실무진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인사 직전 디자인혁신센터의 이 같은 문제점이 신 회장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신 회장은 배 교수를 이번 인사에서 유임시켰다.

수없이 뉴 롯데를 부르짖었던 신 회장의 진짜 승부는 내년부터다. 롯데지주라는 주식에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이유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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